클리포드 스틸은 추상표현주의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미국 현대미술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그는 폴록이나 로스코보다 대중적 인지도는 낮지만, 회화 철학과 작품 세계에 있어 가장 급진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을 가진 화가로 평가받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생애, 회화 철학, 그리고 예술계에 남긴 일화들을 중심으로 스틸이라는 인물의 전모를 살펴봅니다.
1. 클리포드 스틸의 삶: 예술로 독립을 외치다
클리포드 스틸(Clifford Still, 1904–1980)은 미국 노스다코타에서 태어나 워싱턴주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미국 중서부의 황량한 자연 속에서 보내졌고, 이는 후일 그의 회화 세계에 강렬한 자연적 정서로 반영됩니다. 그는 워싱턴 주립대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이후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1940년대 초, 그는 이미 완전히 비구상적인 회화 작업에 도달했고, 이 시기는 잭슨 폴록이나 마크 로스코보다도 앞선 시기였습니다. 1946년 뉴욕으로 이주한 이후 본격적으로 추상표현주의 그룹과 교류하게 되었지만, 그는 빠르게 그들로부터 독립을 선언합니다. 상업화된 미술계와 갤러리 시스템에 대한 불신, 그리고 ‘작가로서의 자율성’에 대한 강한 신념 때문에 그는 스스로 전시를 중단하고 은둔적인 창작을 이어갑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PH-971''(1957)은 검은 배경 위에 붉은 번개형 패턴이 휘몰아치듯 그려진 작품으로, 그만의 강렬한 감정과 형이상학적 표현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생전에 그는 “내 그림은 말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한다”는 말을 남기며, 언어 너머의 절대적인 ‘존재감’을 회화로 전달하려 했습니다.
스틸은 갤러리와 미술시장에 대한 극심한 불신을 가진 작가였습니다. 1951년, 그는 로스코와 뉴먼이 참여했던 유명한 ‘Betty Parsons Gallery’ 전시에서 자신의 그림을 철수시키며 스스로 단절을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두고 “미술은 자본의 놀이가 되어선 안 된다”고 단언했습니다.
그의 또 다른 유명한 일화로는, 미국 내 주요 미술관의 작품 기증 요청을 모두 거절했던 점이 있습니다. 그는 “내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보존될 수 없다면, 작품은 공개되지 않아야 한다”고 고집했고, 그 결과 그의 유산은 사망 후 그의 뜻을 따른 특정 기관에만 기증되었습니다.
이러한 행보는 그를 미술계의 이단아로 만들었지만, 반대로 가장 순수한 창작자라는 신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클리포드 스틸은 한 편의 거대한 회화이자 철학이었으며, 그의 작품은 여전히 현대미술에 도전과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2. 작품 세계와 철학: 인간의 내면을 추상으로 폭발시키다
클리포드 스틸의 회화는 추상표현주의 안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표현방식을 구사합니다. 그는 평면적인 색면 위에 뚜렷한 형태 없이 갈라지는 듯한 색조의 덩어리를 배치합니다. 이는 그 자체로 인간의 내면을 발현시키는 장치로 작용하며, 감상자에게 논리적인 설명이 아닌, 감각과 감정의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합니다.
그는 캔버스를 ‘창’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캔버스는 창이 아닌 세계 그 자체이며, 물질 그 자체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철저히 내면지향적이며, 구상적 요소를 철저히 배제하고 형상화 이전의 감정, 생명력, 에너지의 ‘원형’을 시각화하려 했습니다.
기법적으로도 그는 붓보다는 팔 전체의 움직임으로 그리는 몸 전체의 행위성을 중시했고, 칼날로 색을 긁어내거나, 물감을 두텁게 바르는 방식으로 표면에 강한 물성을 부여했습니다. 작품의 크기 또한 전시장 벽을 가득 채울 정도로 거대하여, 감상자가 그림에 ‘포위’된 듯한 감각을 받게 만드는 것도 그의 중요한 전략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지 않고, 심지어 판매도 꺼렸습니다. 그의 사후 94%에 달하는 작품이 대중에 공개된 적이 없었으며, 이는 2004년 개관한 ‘클리포드 스틸 미술관’을 통해서야 비로소 공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스틸은 상업적 성공이나 대중적 호응보다, 철학적 완성도와 창작자의 독립성을 끝까지 고수한 대표적 인물입니다. 이러한 점은 현대의 ‘미술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중요한 참고점이 됩니다. 그가 남긴 회화는 단순한 시각 예술을 넘어선, 하나의 사상적 텍스트로 기능하며, 이는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심지어 오늘날 NFT 예술의 윤리적 논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스틸의 방식은 회화가 단순히 감상의 대상이 아닌, ‘공간을 점유하고, 감정을 압도하며, 실존을 깨우는 매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이는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의 현대미술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클리포드 스틸은 회화를 단순한 시각 예술이 아닌, 존재와 철학의 매체로 인식했던 진정한 창작자였습니다. 그는 상업주의에 대한 저항, 감정보다 실존을 추구한 회화 철학, 그리고 철저히 독립적인 행보를 통해 미국 미술사에 독보적인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미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됩니다.
3. 추상표현주의 안에서의 위상
스틸은 추상표현주의라는 용어가 정립되기 전부터 이미 비구상 회화를 실험하고 있었습니다. 1940년대 초 그의 작품들은 감정, 내면, 자연의 본질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었고, 이는 이후 등장하는 표현주의 흐름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그는 폴록의 액션 페인팅처럼 극단적인 제스처를 쓰기보다는, 압도적인 색면과 추상적 형태로 구성된 화면을 통해 존재론적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폴록은 무의식을 표현했고, 로스코는 감정을 투사했으며, 스틸은 ‘존재’ 그 자체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회화의 철학적 깊이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끝까지 추구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잭슨 폴록은 작품에 있어서 ‘움직임’과 ‘즉흥성’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드리핑 기법은 작품을 하나의 퍼포먼스로 전환시키며, 작가의 몸짓이 그대로 회화에 기록되는 형식입니다. 반면 스틸은 즉흥적인 표현보다는 ‘형이상학적 공간’의 구축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는 폴록과의 가장 큰 차별점입니다.
마크 로스코와의 차이도 명확합니다. 로스코는 색면과 색면 사이의 감정적 충돌을 활용해 ‘명상적 경험’을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스틸 역시 색면을 활용했지만, 그의 색은 충돌보다는 단절이며, 감정보다는 실존 그 자체를 표현하려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로스코가 침묵 속 감정을 이야기했다면, 스틸은 말 이전의 원초적 충동을 색으로 치환한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