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는 스페인 회화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시대를 앞선 시각을 지닌 예술가로 평가받습니다. 궁정화가로서 화려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의 생애에는 질병, 정치적 격변, 내면의 고통이라는 요소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고야는 예술을 통해 시대의 불합리와 인간의 본질을 날카롭게 직시했고, 작품세계는 생애 전반에 걸쳐 극적인 변화를 보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고야의 인생을 세 가지 주제인 ‘고통’, ‘반전’, ‘철학’으로 나누어, 그가 어떻게 예술가로서 진화해 갔는지를 조명하고자 합니다.
1. 고통: 청력 상실과 내면의 변화
고야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 중 하나는 1793년경 발생한 청력 상실입니다. 당시 그는 40대 중반의 나이로, 왕실과 귀족층으로부터 수많은 초상화 의뢰를 받으며 궁정화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심각한 병으로 인해 청력을 잃게 되었고, 이 사건은 그의 삶과 예술 세계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남겼습니다.
청력을 상실한 이후, 고야는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이전까지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인물이었던 그는 점차 고립되었고, 이 내면의 변화는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었습니다. 그는 점차 사회의 어두운 면, 인간의 광기, 정치적 부조리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작업에 몰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전까지는 귀족의 우아한 모습을 포착하는 데 집중했던 그가, 갑작스럽게 괴기스러우면서도 강한 감정을 표현한 판화 시리즈 『로스 카프리초스(Los Caprichos)』를 발표한 것은 이 변화의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이 시리즈는 스페인 사회의 위선, 종교의 억압, 권력의 부패 등을 강한 풍자와 기괴한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야는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는 문구를 대표 이미지에 새겨 넣었고, 이는 그가 병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메시지였습니다.
청력 상실은 단순한 육체적 장애를 넘어, 고야의 인식 세계 전체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독과 고통 속에서 그는 인간 존재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검은 그림(Black Paintings)’으로 이어지는 내면의 암흑기를 여는 문이 되었습니다. 즉, 고통은 고야에게 예술적 전환을 일으킨 원천이자,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탄생을 이끈 열쇠였습니다.
2. 반전: 궁정화가에서 비판자로
프란시스코 고야는 젊은 시절, 프라도 미술관에 걸린 궁정 초상화들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특히 왕비 마리아 루이사와 왕 카를로스 4세를 그린 작품들은 그의 궁정화가로서의 실력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당시 전통적인 스페인 초상화 기법에 이탈리아의 세련된 감각을 더하며, 귀족 사회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격변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고야는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프랑스군의 스페인 침공과 그로 인한 민간인 학살, 시민 봉기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고, 그 경험은 그의 화풍을 급격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1808년 5월 3일』입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군이 스페인 민중을 학살하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존 궁정화풍의 장엄하고 정제된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고, 화면 전체는 격렬한 감정과 극적인 구도로 가득하였습니다. 고야는 더 이상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며, 예술을 통해 진실을 기록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판화 시리즈 『전쟁의 참화(Los Desastres de la Guerra)』도 마찬가지로 전쟁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참수된 시체, 굶주린 아이들, 울부짖는 여성들. 고야는 이 작품들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이 특정한 정치 이념이나 국가적 승리를 초월한, 보편적 인간 고통임을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삶 자체에 내재한 반전의 서사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권력의 한복판에서 명예를 누렸지만, 동시에 그 권력이 만들어내는 폭력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작가로 변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술은 단지 장식을 위한 수단이 아닌, 사회적 양심의 도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는 고야가 단순한 궁정화가를 넘어선 이유이며, 오늘날에도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본보기로 인용되는 이유입니다.
3. 철학: 검은 그림과 인간 존재의 본질
고야의 말년은 그 어떤 예술가보다도 강렬하고 철학적인 질문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점점 더 외부 세계와 단절되었고, 마드리드 외곽의 '사투르니노 별장(Quinta del Sordo)'에 칩거하며 고독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제작한 벽화들이 바로 ‘검은 그림(Pinturas Negras)’입니다.
이 그림들은 본래 전시를 위한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고야는 자신의 집 벽에 직접 이 그림들을 그렸고, 그 어떤 의뢰인도 없었습니다. 이는 완전히 자유로운 예술가로서 자신의 내면과 마주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Saturno devorando a su hijo)』는 신화의 이미지를 차용했지만, 실상은 인간의 파괴 본능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사회의 자기 파괴적 성향을 암시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고야는 전통적인 미술의 모든 규범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구도, 채색, 주제 그 어떤 것도 고전 회화의 문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완전히 직관적이고, 때로는 광기에 가까운 붓질과 왜곡된 인체를 통해 감정을 쏟아냈습니다. 이 방식은 훗날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심지어 현대 정신분석학적 미술까지도 예고하는 선구적인 시도로 평가받았습니다.
‘검은 그림’은 단순히 어두운 색조를 사용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불안과 고독, 폭력성, 죽음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고야는 이 시기에 이르러, 인간이란 결국 비극적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그 실체를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이는 예술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고야는 말년에 마드리드를 떠나 프랑스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도 조용히 작업을 계속했고, 1828년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며, 그의 말기 작품들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특히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현실을 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오늘날에도 고야를 단지 회화사가 아닌,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평가받게 하는 핵심 근거였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생애는 예술가가 어떻게 시대와 개인적 고통 속에서 변모해 가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와 같습니다. 그는 고통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았고, 반전을 통해 현실을 기록했으며, 철학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색했습니다. 고야의 작품은 단순히 감상용이 아닌 사유의 도구이며,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